* 본문에서 사용된 ‘그’는 성별을 지칭하지 않는 서술상의 대명사입니다.
* 스타듀밸리 2차 창작입니다.
오늘 밤, 부디 나를 알아줘.
꿈나라로 떠나지 말고
내 속사정에 어울리며 함께 울어줘.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손을 얹고 함께 고민해줘.
오늘밤
입술이 갈라지는 갈증을 느끼며,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세상을 안나는 홀로 걷고 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보이는 하얀 입김만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것이었다. 거리에는 쌓이지 않는 눈이 어지럽게 흩날렸고, 어디선가 쏟아져 나온 얼굴 없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 사이로 지나던 안나는 어느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미처 가까워지지 못한 꿈들이 비웃는 듯했다. 유리 너머에 비친 자신은 초라하고 작았다. 안나는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재미없는 어른이 되고 말았다.’
안나는 자신의 인생을 그 한마디로 정의했다.
적당한 대학을 졸업하고, 운 좋게 대기업인 ‘조자’에 사무직으로 취직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제법 괜찮은 삶이었다. 하지만 안나는 점점 회색빛으로 변해가는 세상에서 길을 잃었다. 그저 하루의 끝에서 방황하다 잠이 들면 또 다시 절망스런 아침이 찾아왔을 뿐이었다. 시끄럽게 울려대는 전화벨과 귓가를 찌르는 상사의 목소리. 하나둘씩 회사를 떠나는 동기들. 안나는 사무실 한구석에 앉아 파티션 안으로 몸을 잔뜩 우겨넣고 눈을 질끈 감았다. 곧이라도 굴러떨어질 것 같은 눈물에, 안나는 어린 날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햄스터.
어린 안나의 작은 소망이었던 햄스터. 친구의 집에서 보았던 투명한 케이지 안에서 작고 귀여운 몸으로 쳇바퀴 위를 쉬지 않고 달리던 그 햄스터.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면 느껴지던 보드랍고 따뜻한 온기와, 그 작은 생명이 건네주던 애정이 좋았다. 그날 어린 안나는 집으로 돌아가 햄스터를 키우고 싶다며 부모님에게 한참이나 떼를 썼었다. 하지만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것을 갈망했던 어린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지금의 안나는 문득 그 햄스터와 자신을 겹쳐 보았다. 투명한 케이지 대신 사무실이라는 상자에 갇혀, 조자라는 거대한 회사의 부품이 되어 쳇바퀴를 끝없이 돌리고 있는 자신을.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한 채 같은 자리를 맴돌며, 조금씩 닳아 없어지고 있는 자신을. 그리고 그 끝에 남은 것은, 텅 비어버린 자신뿐이었다.
안나는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계획은 없었다. 서랍 한편에 넣어두었던 할아버지의 편지 뿐이었다. 이름만 어렴풋이 알고 있는 낯선 시골 마을. 그곳에 버려진 농장에서 다시 시작하는 인생은 어떨까. 안나는 고개를 떨구고 할아버지가 남긴 편지를 바라보았다. 이 재미없고 보잘것없는 인생이 만약 연극이라면, 지금쯤 안나는 어둡고 칙칙한 작은 무대 위에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표정으로 독백하고 있을 것이다. 막이 내려갈 기미도 없이.
“나는, 나는……. 바닥이 차요. 평소 같은 하루를 보내다가도 눈물이 나요. 이해받지 못하는 것도 두렵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아가기도 무섭죠. 그래도 저는 오늘을 살아가야 돼요. 그리고 내일을 살아야 해요.”
무대 위의 안나는 그대로 바닥에 얼굴을 맞대고 누워 눈을 감았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것은 슬픔도 아픔도 아니었다. 지금의 자신을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못한 채 그저 가엾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마음이었다. 세상에 닿을 길이 없어도, 외로운 마음이 길을 잃고 방황해도, 단 한 사람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이 지독한 우울도 금방 이겨낼 수 있었을 텐데. 갈라진 천장 사이로 희미한 빛이 들어와 조용히 안나가 있는 곳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 빛을 향해 안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아무도 없는 관객석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대답도, 박수도 없는 것이 안나의 삶을 닮은 듯 했다.
* * *
안나는 막연한 희망을 짐가방에 꾹꾹 눌러 담고는 스타듀밸리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안나는 차마 가져오지 못한 도시에서의 삶을 조금씩 놓아주기로 했다. 자신의 인생이었음에도 온전히 자신의 것 하나 없었던 시간들. 사랑이라는 이유로 이리저리 휘둘려야 했던 날들. 세상이 두려워 소리 없이 울어야 했던 수많은 밤들. 적어도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지금만큼은, 그 괴로운 기억들을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놓아주고 싶었다.
창밖의 풍경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회색빛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높은 빌딩들이 가득했다.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버스가 도시를 벗어나자 건물들의 높이가 하나둘 낮아지기 시작했고, 그 사이로 산과 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버스는 몇 번이고 작은 정류장에 멈추었다가 다시 출발했다.
한 시간, 두 시간.
계속 달리고 또 달리자, 어느새 세상이 조금씩 푸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온 안나에게 초록빛으로 물든 세상은 낯설었다. 하지만 그 낯섦은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오래 잊고 지냈던 작은 기대를 마음 한구석에서 조심스럽게 피워내고 있었다.
“다시, 다시…… 꿈을 꾼다면, 이런 곳이 좋겠어.”
안나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타듀밸리, 펠리컨 마을 그리고 할아버지의 농장.
이름이… ‘스타라이트’였던가.
버스 정류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할아버지의 농장, 스타라이트가 있었다. 안나의 허리께까지 오는 낮고 낡은 나무 울타리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은 넓은 농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때는 누군가의 손길이 머물렀을 곳이었지만, 지금은 폐허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농장 곳곳에는 웅덩이에 물이 고여 있었고 밭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어린아이가 호기심에 농장 안으로 들어왔던 것인지, 흙 위에는 작은 발자국도 남아 있었다. 그래도 이곳은 할아버지가 생전에 소중히 여기셨던 농장이었다.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질퍽한 흙을 두 발로 조심스레 옮겨 디디며 농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오두막 앞까지 걸어온 안나는, 운동화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그러다 문득, 입구에서부터 오두막까지 이어지는 길부터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썩은 나무와 어디에서 굴러왔는지 알 수 없는 바위들을 바라보며, 그것들을 하나씩 치워낸 뒤 그 자리에 무엇을 놓을지도 조금씩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괜찮았다.
바람이 나뭇잎을 간지럽히는 소리와 농장 전체를 가득 채운 햇볕, 그리고 은은하게 퍼지는 흙과 풀의 향기가 기분 좋았다. 안나는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도시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공기였다. 안나는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아무도 안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흔들리고, 햇볕이 조용히 농장을 비추고 있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방황했던 도시에서의 삶은 안나에게 고통과도 같았다. 기댈 곳 하나 없이, 머무를 곳 하나 없이 덤덤히 혼자 걸어갔을 그 아이가 안나 스스로도 너무나 안타까웠다. 숨을 고를 틈조차 없었고, 누울 자리 하나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없었던 인생의 한 부분을 안나는 도시에 두고 왔다. 그리고 이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었다.
안나는 마을의 촌장 루이스에게 선물 받은 파스닙 씨앗 봉투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손가락 사이로도 쉽게 빠져나갈 만큼 작은 씨앗 몇 알이 들어 있었다. 너무 작아서 조금만 방심해도 잃어버릴 것 같았다. 안나는 그중 몇 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작은 것이 흙을 만나고, 햇빛을 받고, 물과 계절을 품으면 언젠가 하나의 생명이 된다는 것이 신기했다.
손끝으로 씨앗을 조심스럽게 굴려 보았다. 자연과 사람의 손길, 그리고 애정을 만나야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작은 생명. 그리고 안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도 이곳에서는 다시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자신도, 타인도 사랑하지 못한 자신이 다시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안나는 손바닥 위의 작은 씨앗을 바라보며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시작이었다.
* * *
도시의 삶에서 벗어나 시골 농부가 된 안나는 조자에서 맡았던 ‘사무직 업무’에는 누구보다 능숙했지만, ‘농사’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 농부였다. 농기구를 어느 용도로 사용해야 하는지, 호미나 도끼를 어떻게 손에 쥐어야 하는지, 힘은 어느 정도로 주어야 하는지. 작물에 물은 얼마나 주어야 하는지, 비료는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어느 날은 피에르의 상점에서 씨앗이 진열된 선반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기도 했다. 이 계절에 맞는 작물은 무엇인지, 어떤 씨앗을 골라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피에르 씨는 좋은 씨앗만 판매한다고 하셨지만, 대체 뭘 심어야 하는 거야?’
안나는 나름대로 인터넷과 책을 찾아보며 농사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글과 그림만으로 농사를 배운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끄응…….”
안나는 작은 신음을 흘리며 애꿎은 씨앗 포장지만 몇 번이고 뒤집어 보았다.
그때였다.
“아니, 이게 누구인가? 스타라이트에 새로 온 농부 아닌가! 하하!”
크고 호탕한 목소리가 피에르의 상점 안을 가득 메웠다.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안나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자의 로고가 크게 그려진 파란색 모자를 쓴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잉거풀 숲에 자리 잡은 펠리컨 마을의 또다른 농부 앤디였다. 놀란 기색을 급하게 감춘 안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앤디 씨.”
앤디는 안나가 들고 있는 씨앗 봉투를 빤히 바라보았다.
“농장은 어떤가?”
안나는 잠시 망설였다. 괜찮다고 대답할 수도 있었지만, 어설프게 둘러대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은……, 잘 모르겠어요.”
앤디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잘 모르겠다?”
“네. 농사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서요.”
사실 안나는 앤디가 조금 불편했다. 이전에 펠리컨 마을 광장에서 루이스에게 크게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안나는 어색한 공기 속에서 손에 쥔 씨앗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괜히 긴장한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안나를 잠시 바라보던 앤디가 호탕하게 웃었다.
“지금부터 시간 있는가?”
안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농부 동지에게 가르쳐줄 게 많을 것 같네.”
안나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농부 동지?’
조금 이상한 호칭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이 싫지는 않았다.
피에르의 상점에서 빈손으로 나온 안나와 앤디는 길을 따라 잉거풀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앤디가 오랫동안 정성스레 가꾸어 온 농장, ‘페어헤븐’이 있었다. 펠리컨 마을로 이사 온 지, 그리고 농부의 삶을 시작한 지 2주가 되었지만 안나는 오늘 처음으로 다른 이의 농장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조금은 설레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긴장되기도 했다.
“평소에는 조자마트를 이용하네만, 오늘은 이상하게 피에르 상점에 가고 싶었다네. 아마 자네를 만나려고 그랬나 보구만.”
앤디는 손으로 레아의 집을 가리켰다.
“저 옆으로 돌아 다리를 건너면 페어헤븐이지.”
다리를 건너며 얼핏 보이는 앤디의 농장은 초록빛으로 아름답게 물들어 있었다. 앤디는 농장의 문을 열고 안나를 향해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안나는 그의 손짓에 조심스레 농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한 계절 동안 앤디가 공들여 가꾸어 온 농장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와……. 대단해요, 앤디 씨. 딸기인가요? 너무 예뻐요.”
“허허.”
앤디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농장에 울려 퍼졌다.
“우리 페어헤븐의 주력 작물은 딸기라네. 자네가 더 훌륭한 농부가 된다면 씨앗을 나눠줄 수도 있지! 우리 농장의 딸기는 개량된 품종이라 잘 자라고, 더 달고 맛있다네.”
안나는 페어헤븐의 딸기밭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키가 작은 딸기 나무에 빨갛고 귀여운 열매들이 총총총 매달려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안나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앤디는 자신이 사용하는 낡고 오래된 호미와 도끼, 낫 등을 보여주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사용하던 것들이라며 하나하나 늘어놓았다. 손에 익어 이제는 다른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다며 웃는 앤디의 모습에서 안나는 사람의 온기를 느꼈다. 처음에는 무섭고 저돌적인 모습 때문에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농부로서의 앤디는 그 누구보다 순박했고, 자신이 일구어낸 농장과 작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날 안나와 앤디는 해가 저물 때까지 페어헤븐에서 농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씨앗을 고르는 법부터 작물을 관리하는 방법,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처리하는 법까지. 잔디가 단순히 농장을 뒤덮는 풀이 아니라 가축의 먹이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하나하나 새롭게 알아가는 것들이 많았다. 책이나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던 것과는 달랐다. 직접 농사를 지어온 사람의 경험을 들으며 배우는 것들은 훨씬 쉽고 선명하게 안나에게 와닿았다. 농부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안나는 그렇게 자신의 농장으로 가져갈 것들을 하나씩 배워갔다. 어느새 처음 만났을 때의 긴장도 조금씩 풀려 있었다.
“난 자네 같은 젊은 농부가 이 마을에 많았으면 하네. 어려운 일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찾아오게나.”
앤디는 환하게 웃으며 안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농부 동지.”
스타라이트로 돌아가는 길, 안나의 마음은 풍선처럼 조금씩 부풀어 올랐다. 앤디와 함께한 시간은 사람으로서도, 농부로서도 따뜻한 응원과도 같았다. 혼자 끙끙 앓으며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기보다, 우연한 인연을 통해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안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왠지 모르게 눈가가 뜨거워졌다. 안나는 손등으로 눈가를 살짝 훔쳤다.
다음 날, 안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조금씩 해나가기로 했다. 오두막 옆, 볕이 잘 드는 작은 공간에 버려져 있던 나무와 돌을 하나씩 치워냈다. 단단하게 굳은 흙을 고르고 가꾸어 작은 텃밭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씨앗을 하나씩 정성스레 심었다. 그중에는 루이스가 처음 선물해주었던 파스닙 씨앗도 있었고, 앤디가 추천해준 콜리플라워 씨앗도 있었다. 돌을 골라내고 좋은 흙을 덮은 뒤 물을 뿌려주었다. 안나는 마지막으로 흙 위에 손을 가만히 얹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작은 소망을 빌었다.
‘잘 자라나길.’
잠시 후, 안나는 아주 작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잘 자라서…… 세상에 존재해주길.”
그렇게 안나는 속삭였다.
오후가 되고, 안나는 농장 뒷길로 걸음을 옮겼다. 이 길 너머에는 로빈의 목공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펠리컨 마을에 처음 왔던 그날, 로빈은 오랫동안 빈집으로 남아 있던 스타라이트의 오두막을 수리해 주었다. 그리고 언제든 필요한 건물이 생긴다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했다. 안나는 그 말을 떠올리며 로빈에게 농장에 닭장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어린 시절 그토록 갖고 싶었던 햄스터는 키울 수 없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농장에서 닭을 키울 수 있었다.
“좋아, 공사는 내일부터 시작할게.”
“감사해요, 로빈 씨.”
조금씩 농장의 형태를 갖추어가는 것이 안나는 내심 기뻤다. 처음에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조차 막막했던 농장이었지만, 이제는 그곳에 하나둘 자신의 흔적이 생겨나고 있었다. 로빈의 목공소에서 나온 안나는 호수에서 바다까지 이어지는 계곡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주민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안나, 좋은 오후야.”
짧은 인사였지만 안나는 작게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펼쳐진 마을의 모습을 눈에 하나씩 담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펠리컨 마을의 해변에 다다랐다. 부둣가로 걸음을 옮기자 시원한 파도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안나는 난간에 기대어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찾고 있는 사람처럼 한참 동안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곳에 온 뒤에도 여전히 막막한 순간은 있었다. 하지만 조금은, 아주 조금은 이곳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담배를 피우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윌리와 마주쳤다.
“아가씨, 낚시 좀 할 줄 아나?”
인사를 건넬 틈도 없이 윌리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내 남은 낚싯대가 하나 있는데, 아가씨한테 딱일 것 같구먼.”
윌리가 내민 낚싯대를 두 손으로 받아든 안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그날을 계기로 안나는 가끔 이곳으로 낚시를 하러 왔다. 어느 날은 혼자서, 또 어느 날은 윌리와 함께했다. 처음에는 낚싯줄을 던지는 것조차 서툴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안나의 낚시 실력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윌리는 그런 안나를 볼 때마다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그 모습에 안나도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고 있었다.
* * *
밤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왔다. 그것은 스타라이트의 오두막에도 마찬가지였다. 침대 하나와 작은 식탁, 그리고 텔레비전이 놓인 방에 안나는 혼자였다. 구석에는 말론이 주고 간 검 하나와 작은 화분이 놓여 있었고, 작은 창으로는 희미한 달빛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안나는 침대 끝에 살포시 앉아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요했다.
시골의 밤은.
불필요한 사람의 목소리도, 귓가를 찢을 듯한 기계음도, 매연을 내뿜는 자동차 소리도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야생동물의 울음소리만이 간간이 어둠을 가르고 지나갔다. 모든 것을 도시에 두고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외로움과 우울까지 떨쳐낼 수는 없었다. 버스 안에서 놓아주기로 했던 기억은 사실 하나도 놓을 수 없었다. 안나도, 나도, 너도.
안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안나가 할아버지의 농장에 처음 왔던 것은 아주 어렸을 때였다. 다섯 번째 생일을 맞기도 전이었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들어선 낯선 마을에서 어린 안나가 처음 마주한 것은 사람의 손길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잡초만 무성한 드넓은 땅이었다. 농장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만큼 황폐한 곳. 그곳이 지금 안나가 살고 있는 스타라이트였다.
안나는 그날 부모님과 마을의 촌장이라는 사람이 나누었던 이야기를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야 알게 된 것은 그 촌장이 루이스였다는 사실이었다. 루이스는 안나의 할아버지가 스타라이트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도 전에 이 땅을 팔 리 없다고 생각했고, 안나의 부모님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럼 이 땅을 팔 수 없다는 겁니까?”
“그렇지 않겠나? 자네 아비가 자네에게 이 땅을 주었는가?”
“쳇! 그 영감…….”
어른들의 대화가 불편했던 어린 안나는 몰래 농장을 빠져나와 마을 광장으로 향했다. 자신이 사라진 것도 모를 만큼 어른들은 농장의 값어치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반면 어린 안나에게 이곳은 새로운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푸르고 높은 하늘. 벽돌로 예쁘게 지어진 집. 깨끗하고 아담한 거리. 도시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안나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눈을 뜨고 나니 부모님의 차 안이었다. 차 안에는 부모님의 목소리만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어린 안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목소리가 무척이나 날카로웠다는 것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몇 년 동안, 안나는 영문도 모른 채 조금씩 혼자가 되어갔다. 부모님의 반복된 갈등은 고스란히 어린 안나의 불안이 되었다. 어른들만 알 수 있는 사정으로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이사를 가기도 했고, 때로는 혼자 친척 집을 전전하기도 했다. 안나는 가끔씩만 만날 수 있는 부모님을 어린 마음에 미워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미워하지 않았다. 그저 낯선 사람들 틈에서 부모를 그리워했다.
어른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평범하지 않은 어린 시절이었지만, 안나는 그것을 평범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부모 없이 자란 자신을 향한 멸시가 가슴에 가시처럼 박힐 때에도, 부모에게는 분명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믿어야 했다. 그렇게 믿어야만 어린 날의 자신을 안고 살아갈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른들은 가끔 어린아이가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기도 했다. 안나는 뒤늦게 알게 되었다. 자신을 두고 떠난 데에는 거창한 이유도, 어쩔 수 없는 사정도 없었다는 것을, 사랑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안나를 향한 것도, 서로를 향한 것도 아니었다. 무책임한 어른들의 감정놀이에 가까웠다.
안나는 오두막 바닥에 조심스레 얼굴을 대고 누워 눈물을 흘렸다.
“바닥이 아직도 차네…….”
우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년을, 몇 년을 더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나서야 겨우 내린 결정이었다. 못된 어른이라고 해도 그들을 끊어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나는 그 아픔을 몇 번이고 마음속 깊은 곳에 내던져보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산산조각 난 어린 날의 마음이, 왜 그토록 자신에게 차가웠는지 이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나는 그렇게 불안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수많은 밤을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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